1980년대 후반은 익스트림 메탈이 그 세력을 본격적으로 확장해 나가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에서는 데스 메탈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포제스트(Possessed)’와 ‘데스(Death)’의 뒤를 이어 ‘모비드 엔젤(Morbid Angel)’, ‘오비츄어리(Obituary)’, ‘카니발 콥스(Cannibal Corpse)’와 같은 후발주자들이 무시무시한 실력을 뽐내며 씬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카르카스(Carcass)’는 상대적으로 익스트림 계열의 영향을 덜 받은 영국의 메탈 씬에서 ‘네이팜 데스(Napalm Death)’와 함께 브리티쉬 데스 메탈을 이끌어 갈 총아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네이팜 데스와 출발점은 같았지만, 특유의 병리학적이고 혐오스러운 소재와 가사로 인해 ‘고어그라인드(Gore-Grind)’라는 서브 장르의 효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 초기 2집 앨범 'Symphonies of Sickness' 중 "Exhume to Consume" (오리지널 음원이나 예전 라이브는 찾기가 힘드네요. 본 영상은 2015년 라이브 영상입니다)
그렇게 3장의 LP를 발매한 후인 1993년, 4번째 정규 앨범인 ‘Heartwork’을 발매합니다. 이 작품은 대단한 흡입력을 가진 앨범이었고, 타이틀곡인 “Heartwork”이 청취자 리퀘스트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차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메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팬덤으로부터 앨범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지나치게 깔끔한 사운드, 비교적 단순한 곡의 구조, 심하게 부각된 멜로디 라인. 이들에겐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카르카스가 기존에 정립했던 날선 잔혹함과 고어함이 사라졌다며 앨범에 혹평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일부 ‘메탈 순혈주의자’들 사이에선 ‘카르카스가 돈에 눈이 멀어 영혼을 팔았다’라는 평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앨범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됩니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호평이 지배적이었습니다. ‘Heartwork’이 이룩한 음악적 성취는 아래 두 웹진의 평가를 통해 간단히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eartwork는 그들의 핵심적인 흉포성을 유지하면서도 오버그라운드의 정제됨을 제대로 조합한 익스트림 메탈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Pitchfork)
“일부 순혈주의자들은 앨범의 멜로딕한 요소들을 욕할 수도 있겠지만, Heartwork는 기존의 것을 세심하게 해체한 후 추가 요소들을 결합해 마치 원래 한 덩어리였던 것처럼 재구축한 매우 드문 걸작이다” (Allmusic)
한마디로 신구 요소의 결합을 통해 그들의 음악을 한단계 더 높은 레벨로 승화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자는 카르카스의 음악 뿐 아니라, 익스트림 메탈 씬의 변화, 좀 더 구체적으로는 멜로딕 데스메탈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음반과 멜로딕 데스메탈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근거는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들의 음반이 나온 후인 1995년~1996년 사이에 멜로딕 데스메탈을 정의한 3장의 앨범(At the Gates의 ‘Slaughter of the Soul’, Dark Tranquility의 ‘The Gallery’, In Flames의 ‘Jester Race’)이 연달아 쏟아져 나온 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 너무나 유명한 곡이죠? 타이틀곡 "Heartwork"의 M/V
그리고 또 하나, 당시 메탈 씬을 둘러싼 변화의 흐름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1990년대 초는 너바나의 등장으로 대중음악 판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으며, 이 변화는 메탈 밴드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991년 메탈리카의 ‘블랙 앨범’, 1992년 메가데스의 ‘Countdown to Extinction’, 세풀투라의 ‘Chaos A.D.’, 판테라의 ‘Vulgar Display of Power’ 등 기존의 복잡하면서도 긴 곡의 구성을 벗어나 스트레이트하면서 그루브한 음악이 메탈 씬의 주류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Heartwork’ 앨범에서도 이런 그루브감의 강조, 간결해진 곡의 구조 등을 통해 당시의 음악적 변화를 반영함과 동시에 보다 많은 청중들에게 자신들의 음악을 알리고자 접근성을 낮추려는 시도를 한게 아니었을까요?
‘Heartwork’은 익스트림 메탈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 새로운 시도였을 뿐 아니라, 청중들로 하여금 그 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청각적 쾌감에 눈 뜨게 한 역작이었다는 점에서 카르카스의 변화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앨범은 ‘롤링 스톤’지에서 뽑은 역대 최고의 메탈 앨범 100중 51위를 차지했으며, ‘메탈 해머’지에서 뽑은 최고의 브리티쉬 메탈 앨범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카르카스가 재결합 후 무려 17년만에 발매한 앨범 'Surgical Steel'(2013년)은 비평적으로 'Heartwork' 못지 않은 극찬을 받으며 그들이 아직 진화 중임을 증명한 작품입니다. 이 앨범 중 수록곡 중 하나인 "The Granulating Dark Satanic Mills"를 들으면서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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